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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8일 설교 말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은혜 (김은호 목사)

 

[창세기 2:8-17]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4.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에덴동산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을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다.

[창세기 2:8]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에덴동산은 오늘의 이라크 근방일 것으로 추정된다. 에덴동산은 모든 면에서 완전하고 풍요한 곳이었다. 그런데 에덴동산 중앙에는 특별한 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창세기 2:9]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우리는 이 두 나무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이 선악과를 복숭아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사과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나무이고 열매인지는 알 수 없고 중요하지도 않다. 그 열매 자체가 효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두 나무와 열매를 통해서 언약의 말씀을 주셨다는 것이다.

 

생명 나무는 어떤 언약이 담겨 있는가? 구속사적으로 보면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영원한 생명을 말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언약 내용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게 되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다.

 

[창세기 2:17]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언약의 당사자인 아담과 하와는 언약을 파괴하고 그 열매를 따 먹었다. 그래서 우리 인간 세계에 죽음이 왔다. 따 먹는 순간 영적인 죽음이 임했고 에덴동산을 쫓겨나 육체의 죽음을 맡게 되었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멸절이 아니다. 죽음은 분리다.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과의 분리를 말하고 육체의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말한다.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과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영적인 죽음으로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육체의 죽음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말한다. 육체는 영혼을 담고 있는 그릇과 같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로 육체의 그릇이 깨어지면 영혼과 분리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육체의 죽음이다.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었는가?

먹을 것이 없어서? 호기심 때문에? 많은 사람이 호기심 때문에 죄를 짓게 된다. 담배, 동성애 등이 그렇다. 아담과 하와도 그랬을까? 아니다. 의도적인 반역이었다. 하나님의 지배를 더 이상 받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려는 의도적인 반역이었다.

[창세기 3:5]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사탄은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에서 인간이 지배하고 인간이 다스리는 인간의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아담과 하와는 이 말에 선악과를 따 먹게 되었다. 뱀이 따준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가 직접 따 먹었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이 뱀의 유혹을 막지 않고 방관하셨는지를 따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놓고 인간을 구원하시겠다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 십자가에서 죽이시는 번거로운 일을 하셨을까? 하나님은 병 주고 약 주는 분이신가?

결과만 보지 말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숨겨진 하나님의 사랑을 보아야 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은혜

1. 피조물로서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도록 하기 위하여

아담과 하와는 대단한 존재였다.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써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었다.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다윗은 이것을 시편 8편에서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고 한다.

[시편 8:5]

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영화와 존귀라는 표현은 인간에게는 사용할 수 없는 단어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을 닮은 그런 존재로 지으셨다는 것이다.

 

[시편 8:6]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주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머리에 영화와 존귀의 관을 씌워주신 것이다. 모든 피조물들은 아담과 하와 앞에 고개를 숙이고 그 다스림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창조주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었다. 만물의 영장이지만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었다. 어항 속의 물고기가 어항의 물을 떠나면 죽는 것과 같다.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에덴동산 한가운데 매일 볼 수 있도록 선악과를 두신 것이다. 매일 그것을 보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피조물로써 철저하게 자신의 신분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도록 하신 것이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똑똑해도 우리는 피조물이다. 피조물인 우리는 언제나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 수밖에 없다.

 

2. 자유의지를 주심

[창세기 2:16-17]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네가 임의로 먹되라는 것은 어떤 사실을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음을 알 수 있다. 로봇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셨다.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거역할 수도 있게 만드셨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꼭두각시처럼 산다면 무슨 기쁨과 감격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게 하셨고 그 결정에 책임을 짓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이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순종은 강압적인 것이 아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경험할 수 있도록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요한일서 4:7]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요한일서 4:8b]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이 곧 하나님이시다.라고 오해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 대표적인 성품이 사랑이시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분이시다.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분이시다.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만 사랑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심

그런데 사랑은 대상이 필요하다. 그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 인간을 지으셨고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 주셨다.

 

[창세기 2:9b]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동산 중앙에 두었다는 것은 매일매일 볼 수 있는 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매일매일 이 선악과를 보면서 어떻게 반응했을까? 불평했을까? 아니다. 뱀의 유혹을 받기 전까지는 한낱 피조물인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됨을 감사하며 살았다. 그 어떤 피조물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교재를 나누며 살았는가?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긴다. 별로 감동도 없고 감사하지도 않는다. 남편, 부모로부터 사랑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그 사랑을 받아도 별로 감동하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사랑을 주어도 감동과 감격이 없다.

 

진정한 사랑은 선택을 필요로 함

그래서 하나님은 에덴동산 중앙에 생명과 선악과 나무를 두셨다. 스스로 선택하게 하셨다. 선택할 여지가 없는 것을 사랑하라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어쩔 수 없었어, 힘으로, 환경 때문에 하는 사랑은 인격적인 사랑이 아니다.

 

우리가 왜 한 아내와 남편을 사랑하는가?

최고이기 때문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랑은 인격적이지 않을 수 있다. 왜냐면 더 최고가 나타나면 사랑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더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더 좋은 사람이 있지만 내 남편과 아내를 사랑한다. 왜냐면 내가 사랑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육신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이 얼마나 좋고 매력적인가? 하지만 우리가 왜 세상보다 우리 주님을 더 사랑합니까? 내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아무리 더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여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강제로 하는 것이 아니다.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셨다.

[신명기 30:19b]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오늘 우리 앞에는 여전히 생명 나무와 선악과 나무가 있다. 세상이 있고 주님이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매일매일 생명 나무를 선택하시기를 바랍니다. 저주가 아닌 복을 선택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의 쾌락보다 우리 주님을 이전 보다 더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 나무가 주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아멘.